슬립 노 모어(2025.9월)

9월 5일 대한극장(매키탄 호텔) 19:00

오랜만에 연극을 봤다. 나는 전직 뮤덕(2009-2012) 출신으로 대학로 및 기타 극장들에서 화려하게 재산을 폭사시킨 전적이 있었다. 빌리엘리어트 초연이 내 마지막 초신성같은 덕질이었고, 그 이후에는 뮤지컬판에서 젊은 여성팬들 취급하는게 더러워서 판을 박차고 떠났다. 그 이후 가끔 공연을 봤지만 예전같이 무대에서 반짝거림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유튜브에서 우연히 이 극 소식을 보고 충동적으로 공연을 예매했다. 소문으로 들어왔던 이머시브 공연이라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국에서 이 정도 스케일의 공연을 두 번 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제부터 님이 돌아다니셔야할 건물입니다.

– 티켓 값 이슈 : Ruby’s guest 

아니, 그런데 근 10년만에 공연을 봤더니 티켓 값이 이게 말이 돼? 충동적으로 일 벌리는데 선수인 나도 멈칫할 만한 가격이었다. 게다가 좌석 등급에 따라 볼 수 있는 공연 시간이 줄어든다고…? 이런 신박한 자본주의 컨셉은 뭔지. 괜히 몇 만원 때문에 공연 시간이 늦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Ruby’s guest로 구매했다.

공연도 재밌고, 주류도 극장치고는 선택지가 넓다. 칵테일도 기대보다 괜찮았다.

실제로 가보니 뭔가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은 공연 전 30분/공연 후 30분이고(퇴장 시 사람들이 몰리므로 이 시간도 줄어들 수 있음),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동석해서 술을 마셔야하는 분위기라 영 편안한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또 3시간 동안 거의 쉬지 못하고 경보로 다녀야하니, 마지막에는 좀 앉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긴 하다. 가격 대비 좌석과 공연 시간을 모두 잡은 Ruby’s Guest가 가장 괜찮은 느낌이다. 

– 준비물

1) 줄거리는 맥베스에 기반하나 레베카도 조금 섞은 듯. 맥베스 정도는 읽고 가는 게 좋다. 레베카는 뮤지컬을 봤으면 충분한 정도. 레베카의 오마쥬로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특정 루트가 아니면 거의 안 만날 수도 있다. 나는 맥베스 원본을 읽고, 슬립 노모어와의 차이점을 챗지피티에게 물어봐서 숙지하고 갔다. 

2) 쿠션이 확실한 운동화, 그리고 활동성 좋은 옷 

실제로 걸은 건 5500보 정도. 막판엔 집에 가고 싶기만

계속 계단을 오르내리고 서서 극을 감상하려면 좋은 운동화가 필요하다. 게다가 사람들이 몰리게 되면 서로 발을 밟게 되거나 부딪히는 일도 허다하니 발을 보호할 만한 것을 신는 것이 좋다. 안이 딱히 더운 것은 아닌데, 한 공간에 사람들이 엄청 몰리다보니 덥고 습하게 느껴진다. 3시간을 버틸 수 있는 쿠션 좋은 운동화, 통기가 잘 되는 옷으로 추천한다.  

– 줄거리 

자세한 건 과감히 생략한다. 그다지 스토리가 중요한 극은 아니다. 궁금하시면 다른 블로그들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그 쪽을 참고하시라. 전반적인 진행은 같은 극을 1시간 간격으로 3회 반복하며(싼 티켓을 산 사람은 입장 시간이 늦으므로 공연 시간을 날리게 된다), 3번째 마지막 엔딩만 다르다.  

– 배우 

순서대로 장준혁, 신상미, 김영은 배우

회차 마다 조금씩 바뀌는 모양인데, 인상적이었던 배우들만. 맥더프역의 장준혁 배우가 매우 잘 생겨서 아이돌인 줄 알았다. 섹시 위치 역의 신상미 배우가 여자인 나에게도 정말 매력적이었다(손 잡아줘서 고마워요). 버스 부인 역의 김영은 배우, 해괴한 화장에도 매우 귀여웠다. 임산부를 상대로 BDSM 연기를 펼칠 줄이야. 

– 주의점 

1) 광과민성

마녀들이 광란의 춤을 추는 유명한 장소+씬이 있는데 광과민성 문제가 있는 사람은 주의해야한다. 난 편두통 정도만 있는 사람이지만 위험한 수준이라고 생각해서 중간부터는 눈을 오래 감았다가 뜨곤 했다. 

2) 야맹증 걸린 사람은 주의 

짐을 맡기는 이 다음 공간부터 정말 어둡다.

야맹증이 있는 사람은 초반 입구 부분을 조심해야한다. 입구에서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정말 어두운데, 스탭들조차 없는데다가 길기도 길고… 뒤에서 사람들이 줄줄히 들어오기 때문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사람으로서는 엄청난 압박이 느껴진다. 다행히 앞 사람이 금발이셔서(…) 그것만 따라갔다. 다행히 공연장 안은 어둑하기는 하지만 야맹증 문제가 일어날 정도는 아니다.  

3) 체력

앉을 장소가 많지 않다. 가끔 소파라던지 침대, 기댈 수 있는 곳들이 있긴 한데 이마저도 배우들의 동선에 들어있는 경우가 많고, 오래 기대있으면 스탭들이 제재하기도 한다. 적어도 3시간을 서고 걸을 수 있는 몸 상태이길 추천한다. 

4) 관중 

VIP로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은 확실히 편안하게 공간을 즐길 수 있지만, 뒤로 갈수록 사람이 많아지고 특정 캐릭터들에게 사람들이 몰리면서 나중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 배우를 따라가게 된다. 배우들이 교차하는 씬이면 관객들은 더욱 많이 부딪힌다. 게다가 배우들이 무용을 해서 빠르기도 오질나게 빠르다. 계단 포함 거의 뛰다시피 파워 워킹해야한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부딪히거나 발이 밟히는 것은 예사기 때문에 언제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길 바란다.  

– 기타 감상 

2회차 지나니까 배우들 눈이 풀려있었다. 나는 봤다. 배우가 잠깐 바 뒤에 쭈그려 앉아서 ㅇ_ㅇ)하고 숨어있는 것을… 3회차 지나면 관객들도 눈이 풀려있다. 

아! 그리고 모두가 모두와 키스한다. 저 배우 중 한 명만 코로나 걸려도 극 망할 것 같은 느낌이다.

외국인 배우들이 나체인 장면들이 있는데, 그 장면들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역할로 쓰여질 뿐이다. 

– 전체적인 감상

돈 값은 확실히 한다. 이 큰 빌딩의 여러 층을 소품들로 꽉꽉 채우고, 스텝들도 층마다 다수 배치되어 있다. 참여하는 배우들도 외국인들 포함 열 명이 넘어가니 티켓값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다만 나는 노래와 연기를 중요시하는 뮤덕 출신이라 배우들의 춤으로 이루어진 이 극이 조금 지루했고, 순간순간 장면의 이미지로만 구성되어 있어 알맹이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관객에게 맥베스의 증인이자 경고를 받는 자라는 역할을 준 것은 관객참여형 연극에서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절규하는 배우들보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같은 가면을 쓰고 모든 각도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숨막히는 이미지가 나에게는 훨씬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관음하며 증인의 역할을 했던 관객이 엔딩 씬에서 교훈을 받자마자 또 다시 다른 먹잇감을 찾아 바퀴벌레처럼 흩어지는 것 역시 장관이었고. 

하지만 극의 현장감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면 이 극의 타겟층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12월 31일까지 진행하니 한 번 정도는 보는 것을 추천. 

그리고 이 극은 혼자 가서 보면 가성비가 그다지 좋지 않다. 가장 합리적인 관람 방법은 여러 명이 가서 쫘악 흩어진 다음, 서로 이야기해서 스토리를 이어 붙여보는 것이다. 아무리 리뷰를 읽고 가도 몇 층의 어디에서 누가, 어떤 일을 한다는 걸 알아도 막상 2번째 턴까지는 공간과 동선에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반복 감상을 할 게 아니라면 친구들과 함께 가길 추천한다. 

(이 글은 2025년 11월 21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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